SSD 컨트롤러, 고난도를 자랑하는 스토리지 컨트롤러 분야에 한국 스타트업이 출사표를 던졌다. 한국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말고는 독자 설계가 불가능한 칩이다. 서울대 반도체 연구실에서 파두 연구원들이 박사 시절부터 십수 년을 갈고닦은 노력이 빛날 날이 머지않았다.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메모리로 만든 하드디스크(HDD, 컴퓨터 대용량 저장장치)다. HDD는 물리적인 자기디스크가 있어 핀이 회전하는 디스크의 이곳저곳을 읽고 쓰며 저장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낸드플래시메모리(이하 낸드) 기술이 발전하고, SSD 가격도 해마다 절반씩 떨어졌다. 저장장치가 물리 디스크에서 플래시메모리로 바뀌자 속도도 몇 배 이상 빨라졌다. 코로나19 사태로 넷플릭스 같은 동영상 스트리밍서비스(OTT) 수요까지 폭증하면서 전 세계 데이터센터도 SSD로 대거 교체에 나섰고 제2의 낸드 전성기가 도래하고 있다.
문제는 통로다. 중앙처리장치(CPU), 메모리, SSD 모두 속도가 빨라졌지만, 서로를 잇는 통로는 여전히 HDD 시절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2015년 나온 게 NVMe(Non Volatile Memory express) 기술 표준이다. 기존 SATA(Serial Advanced Technology Attachment) 규격보다 25배 이상 더 많은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통로 역할을 할 NVMe 기술 표준에 맞춘 고성능 SSD 컨트롤러를 만드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반도체 강국인 한국에서도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정도만 만들 수 있고, 세계적으로 인텔, 마이크론, 도시바 정도가 낸드와 SSD를 이해하고 컨트롤러를 독자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기업이다. 여기에 파두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파두는 새로운 대안도 가지고 나왔다. 기존 영국 ARM 기반의 컨트롤러가 시장의 주류를 이루는 데 반해 파두는 한국 스타트업 세미파이브와 함께 리스크파이브(RISC-V)라는 오픈소스 하드웨어 설계자산을 활용한다. 2015년 6월 창업 후 1년 반 만에 시장에 이름을 알렸다. 2016년 말 미국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 있는 인텔 연구소에서 파두 컨트롤러를 탑재한 제품이 자사 SSD(DC P3608), 삼성전자 SSD(PM1725)를 비교한 결과, 임의쓰기 3배, 복합 작업에서 2배 높은 성능을 보이며 타사 제품을 앞선 것. 물론 삼성과 인텔의 컨트롤러 기술은 그때보다 훨씬 더 성장했지만, 파두가 독자 NVMe 컨트롤러 기술을 가졌다는 걸 알린 자리임은 분명하다.
“다들 CPU, GPU, 메모리 반도체 기술이 어려운 줄 알지만, 엔지니어로서 감히 말하는데 컨트롤러 설계가 훨씬 더 어렵습니다. 다른 건 로직 싸움인데 우리는 컨트롤러 로직에 메모리와 인터페이스, 운용소프트웨어 기술까지 통합, 최적화해야 합니다. 플래시메모리가 뭐가 문제냐고 생각하는 분이 많은데 사실 에러도 많고 단점도 꽤 있습니다. 컨트롤러는 이런 오류를 순간순간 잡아내며 실제 유저들이 불편 없이 쓰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지난 2월 9일 서울 강남구 선릉로 파두 사무실에 만난 남이현(45) 대표가 말했다. 그는 “한국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낸드 생산 기업이 있어 기술국가로는 산유국이나 다름없다”며 “산유국도 아닌 한국이 정제 시설을 세우고, 자동차·선박 산업을 발전시킨 만큼 우리가 15년 이상 반도체 스토리지 분야에서 쌓은 지식과 기술이라면 컨트롤러 기술도 세계적인 수준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고 덧붙였다.
남 대표는 서울대 전기공학부에서 학사와 석박사를 모두 마쳤다. 박사과정에서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 메모리·스토리지 구조 연구실 출신들과 맺은 인연을 모아 파두를 창업했다. 현재 공동대표인 이지효 대표는 글로벌 컨설팅업체 베인앤드컴퍼니 출신으로 비즈니스를 맡고 있고, 남 대표는 SSD 컨트롤러 기술개발을 총괄하고 있다.
지금껏 거둔 매출은 소액이지만, 정부와 시장이 파두에 거는 기대는 크다. 지난해 말 중소벤처기업부(이하 중기부)는 파두를 비롯해 15개사를 예비유니콘 특별보증기업으로 선정했다. 특별보증기업에는 최대 100억원까지 보증 지원을 해 성장을 돕는다. 이보다 앞선 4월에도 중기부는 영국 ARM, 코아시아, LG디스플레이, 현대오트론, 서울대와 시스템반도체 혁신기업의 성장 지원을 위해 기업 협약을 맺고, 파두 외 9개사에 설계 패키지 지원, 교육지원 등을 약속했다. 투자금도 꽤 몰렸다. SK인포섹이 엔젤 투자 격으로 15억원을 투자한 것을 시작으로 국내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포레스트파트너스와 레버런트파트너스, 산업은행 등에서 받은 투자금이 800억원이나 된다. 파두는 직원 100명 중 90명이 박사급 엔지니어일 정도로 고성능 컨트롤러 기술 강화에 매달리고 있다. 특히 10만 대 넘는 서버를 운용하는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IDC)가 첫 번째 타깃이다. 글로벌 조사기관 시너지 리서치그룹에 따르면 2020년 말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운영 중인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는 597개, 2015년 말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남 대표도 데이터센터 얘기부터 꺼냈다.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 얘기가 자주 나온다.
빅데이터 시대다. 코로나19 이후 데이터센터 확장세가 훨씬 커졌다. 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 같은 글로벌 테크사들은 이메일, 사진, SNS, 영상 등의 데이터가 급증하자 자체 데이터센터를 짓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모든 것이 기록되는 빅데이터 세상이다. 여기에 기업들이 아마존웹서비스(AWS), 마이크로소프트 애저(Azure) 등 클라우드 서비스를 도입하면서 데이터센터 한 곳의 규모 자체가 커졌다. 무한정 규모를 키울 수 없기에 새로운 반도체 인프라가 필요해졌고, 앞으로 SSD의 최대 수요처로 보고 있다.
반도체 분야에서 ‘무어의 법칙’이 깨졌다는데.
반도체 업계가 겪은 변곡점이다. CPU나 GPU가 혁신적인 성능으로 시장 성장을 주도하던 시대가 지났다는 뜻이다. 성능도 두 배, 전력 효율도 두 배. 시장에 내놓기만 하면 PC 시장도 메인보드부터 부가 산업이 싹 다 전환되면서 부흥기를 이끌었다. 하지만 지금은 5나노, 7나노 초미세 공정을 도입했다고 해서 성능이나 효율이 무조건 높아지는 세상이 아니다. 기존 공정의 낸드와 컨트롤러를 하드웨어·소프트웨어 두 부분에서 어떻게 최적화를 끌어내느냐가 관건이 됐다. 심지어 어떤 글로벌 업체는 성능보다 저전력·저발열을 평가 핵심 요소로 내세우기도 하는데, 특히 페이스북이 제일 민감하다.
시장에 SSD를 만드는 업체가 많은 것 같다.
제품만 보면 그렇다. 하지만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인텔 정도가 아니고서는 낸드와 컨트롤러를 사서 쓰는 식이다. 자체 설계한다고 해도 독자적으로 개량 설계를 주도할 수 있는 기업은 드물다. 우리도 낸드 자체를 생산하는 곳은 아니지만, 그 외에는 독자 설계한다. 이제 파두는 아예 낸드를 공급할 테니 완제품을 만들어달라는 기업, 컨트롤러만 공급받겠다는 기업 등 두 부류로 나눠 얘기 중이다. 지금까지 눈에 띄는 매출은 없지만, 올해 본격적인 매출 계약이 이뤄질 것이다.
2018년 인텔 연구소에서 글로벌 제조사보다 뛰어난 성과를 거뒀다.
곡절이 있다. 2016년으로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사실 우리끼리는 10년 이상 반도체 메모리·스토리지 구조 설계 연구를 했으니 잘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글로벌기업 입장에서는 기술검증(PoC)을 해야 믿는 게 상식이다. 당시 가을쯤 회로 변경이 가능한 비메모리 반도체(FPGA)에 컨트롤러 기능을 얹혀 미국 인텔로 날아갔다. 실제 테스트 리포트에서 성능도 좋았고, 전력도 덜 소비했다. 그렇게 2년 후인 2018년 7월 기술검증까지 마치고 자체 컨트롤러 반도체를 내놨다.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다.
끝난 게 아니었나.
이때부터가 진짜(?)였다. 데이터센터를 가진 글로벌 테크사에서 구체적인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뭘 믿고 이 컨트롤러를 쓰냐’면서 ‘실제 SSD를 만들어와라’, ‘모듈 하드웨어도 설계해봐라’, ‘양산에 들어가면 수율 관리는 어떻게 할 수 있냐’, ‘SSD 생산 1만 대 이상 기준으로 품질관리는 어떻게 할 거냐’ 등 질문이 쏟아졌다. 가시밭길이었다. 당장 어느 회사인지는 밝힐 수 없지만, 2020년 코로나19 상황임에도 글로벌 메이저 데이터센터와 성능 테스트를 거의 마쳤다. 대부분의 기술적 요구사항도 해결한 상태다. 꼬박 1년이 걸렸다.
정말 어렵게 느껴진다. 그래도 이 분야를 택한 이유가 있나.
설계의 ‘수직계열화’다. 과거 현대차가 ‘쇳물부터 완성차까지’를 외치며 수직계열화에 나섰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도 반도체 소재부품 사업의 역량 강화를 꾀하며 비슷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컨트롤타워이면서 강력한 조력자 역할을 하는 컨트롤러 반도체 기술이 그렇다. CPU, GPU, 메모리(낸드) 스토리지, 인터페이스 등 주요 반도체를 다 이해하면서 문제없이 돌아가게 해야 한다. 특히 낸드는 완벽하게 통제해야 한다. 애플은 그런 면에서 대단하다.
왜 애플인가.
데이터센터는 하나의 큰 컴퓨터라고 생각하면 된다. 대척점에 선 곳, 가장 작지만 하나의 컴퓨터를 잘 만드는 회사 애플이 떠오른다. 본질적으로 데이터센터와 스마트폰이 다르지 않다. CPU, GPU, 메모리 스토리지, 네트워크 장비를 한데 아울러 설계한다. 소프트웨어까지 하드웨어를 활용하는 데 최적화돼 있다. 설계에 군더더기가 없다. 메모리 스토리지의 위상도 CPU와 GPU를 능가하는 세상이 왔다. 이러다 SSD에 모든 걸 통합한 반도체가 나올지도 모른다. SSD의 능력이 고도화될수록 우리는 기술 자산을 확장해 데이터센터 전체를 설계하고 최적화할 수 있다. 최종 목표도 SSD 컨트롤러 회사로 머무는 데 있지 않다.
구체적인 성과나 매출이 없다는 이들도 있다.
2015년 6월 창업했으니까 햇수로 6년 차다. 처음 시작할 때는 이런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말도 안 믿었다. 한국 스타트업이 6년 남짓한 시간에 성능 테스트를 통과해 글로벌 제조사와 견줄 수준까지 오른 것조차 기적에 가깝다. 우리가 수조원씩 드는 메모리 공정을 세우는 것은 아니지만, 공정 하나로 완제품을 만드는 데 수백억원이 든다.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만, 5억~10억원의 자금 규모로는 반도체 강국에서 부가가치 산업을 키운다는 게 말이 안 된다. 반도체 산업에서 한국이 (반도체) 토양이 워낙 좋아 수백억원만 투자해도 수천억원 가치의 반도체 부가 사업을 키울 수 있다. 바이오 분야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다는 데 시장의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된 것 같은데, 반도체 분야는 이제 시작인 듯싶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아직도 우리가 ‘진짜’냐고 묻는 곳이 있다. 한국 스타트업이 이게 가능하냐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버티고 있는 한국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다. 미국에는 최고의 공학 인재가 소프트웨어 분야로 몰린다. 반면 한국은 대학과 기업에 막강한 반도체 엔지니어가 대거 포진한 제조업 강국이다. 파두를 비롯해 수많은 한국 반도체 스타트업이 차세대 반도체를 만들어 낸다는 데 내 한 표를 걸겠다.
김영문 기자 ymk0806@joongang.co.kr·사진 지미연 객원기자